간두지세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그가 남긴 역사의 빛과 그림자기타레포트거안사위

오늘의 고사성어 – 묘두현령 :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 곧 실행할 수 없는 공론을 자청하는 말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 그가 남긴 역사의 빛과 그림자기타레포트

명성왕후, 그가 역사에 남긴 빛과 그림자

I. 들어가기
11월 6일은 명성황후가 시해된 지 103년이 되는 날이다.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그에 대한 정당한 평가가 이루어지지 못한 듯 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우선 그에 대한 호칭마저도 온전치가 못하다. 민비? 명성왕후? 혹은 명성황후? 그 어느 경우도 우리에게 흡족한 해답이 아닌 듯 하다. 그렇지만 여기에서는 그가 시해된 지 2년 후에 追尊된 명성황후라는 호칭을 사용코자 한다. 그것이 비운에 간 그녀에 대한 예우요, 대한제국 최초의 황후였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 되기도 하겠기 때문이다.

조선왕조의 문호개방은 자주적인 입장에서만 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 시련을 수반하고 있었다. 개항전후의 조선사회는 정치적 혼란과 재정적 궁핍, 그리고 사상의 혼돈 등 전통사회의 내재적 붕괴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었음은 다 아는 사실이다. 그 한 가운데 명성황후가 자리하고 있었다. 여기서는 그녀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 대원군과의 갈등과 정치적 궤적, 그리고 명성황후에 대한 또 다른 평가 등에 대하여 간단히 살펴보고자 한다.

I . 명성황후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된 배경

역사의 라이벌 명성황후와 대원군은 서로 뗄 수 없는 인연으로 만나 각자의 위치에서 탁월한 능력과 결단력으로 시들어 가는 조선왕조의 불꽃을 마지막으로 살려내는데 결정적인 구실을 하는 듯 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왕조의 몰락을 재촉한 비극의 한 가운데서 역사의 조명을 받게 되었음은 잘 알려 진 바와 같다.

원군의 부인 민씨가 추천한 민치록의 딸-민아영은 8살에 부모를 여의고 외롭게 자라 대원군이 가장 경계하는 세도정치의 발호를 예방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흥선대원군에 의해 왕비로 간택된 16살의 민아영은 이로써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지만 이들의 숙명적인 악연이 이에서 비롯될 줄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의 정적들-대원군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趙大妃 세력, 원로대신 세력, 안동 김씨 세력, 유림세력-을 은밀히 규합하고 유림의 선봉장 최익현의 대원군 규탄상소를 계기로 그를 하야시키는데 성공하였다. 無所不爲의 막강한 힘의 상징이었던 대원군이 深慮遠謀 끝에 간택한 자신의 며느리에게 무릎을 꿇고 만 것이다.

대원군을 실각시킨 명성황후는 민씨 戚族을 앞세워 정권을 장악하고 고종을 움직여 일본과 강화도조약을 맺어(1876) 최초의 근대적 개항을 함으로써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뒤집었다. 그러나 조선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을 거치면서 근대적 국가로 발전할 수 있는 자체의 역량이 부족한 징후를 곳곳에서 나타냈다. 옛 것을 고수하고자 하는 유학자들은 쇄국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는 등 개항 자체에 극력 반대하였고 집권층도 근대화를 추진시킬 만한 능력을 제대로 갖추고 있지 못한 實情이었다. 서구문화에 대한 근본적 이해가 부족했던 민씨 정부는 親淸事大로 흐르게 되고 청의 지원을 얻은 민씨에 의해 개화의 꿈은 잠시 물밑으로 갈아 앉는 것 같았다. 이후 20여 년간 국내외의 이해세력과 침략적 서구열강들의 복잡 미묘한 사건들에 직, 간접으로 관계되고 이용되며 이들은 부침을 거듭했다.

II . 명성황후와 대원군과의 갈등과 정치적 궤적

그러나 명성황후는 외교적 국면에 매우 기민하게 대응하며 정치적 수완을 발휘하였다. 이제 명성황후가 취한 외교적 수완을 적시해보자. 1885년 영국에 의해 거문도 사건이 일어나자 독일인 고문 묄렌도르프(Mollendorf)를 파견한 왕비는 영국과 더불어 사태수습을 협상하면서 한편으로 러시아와도 접촉하게 하였고 또한 청국과의 관계도 유연하게 조정, 유지해나갔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의 소용돌이를 틈타 재빨리 뛰어든 일본은 ??미개를 문명시킨다.??는 구호아래 갑오개혁을 강요하였다. 일본의 침략적 야심을 간파한 명성황후는 일본의 배후에 있는 개화파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親러시아 정책을 내세우고 노골적으로 일본과 관련 세력들에게 대항하였다. 청일전쟁의 승리로 대륙침략의 기세가 오른 일본을 견제해야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여러 이익을 확보할 수 있다고 판단한 러시아는 독일, 프랑스와 함께 일본에 압력을 가하였다. 소위 3국 간섭이 그것이다. 열강의 압력에 변화된 자세를 취하는 일본의 태도를 감지한 민씨 정부는 더욱 親러정책을 강화해 갔다. 일본의 한반도 침략정책에 정면으로 맞서는 민씨와 親러세력을 제거하지 않고는 조선을 장악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게된 일본은 마침내 권력의 핵심인물인 왕비를 제거하기 위한 모종의 음모를 획책하기에 이른다. 즉 일본은 이노우에(井上馨)공사를 소환하고 대신 예비역 육군 중장 미우라(三浦梧樓)를 공사로 파견해 극비리에 왕비제거 작전을 추진했던 것이다. 일본은 때마침 解散說로 민씨 정부에 불만을 품은 훈련대의 간부들을 끌어들이고 거사일 새벽 대원군을 위계로 종용해 浪人輩를 앞세워 궁성을 공격했다.

1895년 11월 6일(음력 10월 8일) 새벽, 궁성으로 난입한 일본공격대는 저항하는 시위대와 책임자(이경직), 그리고 대신들을 거침없이 사살, 살해하고 왕과 왕세자를 협박하고 위해하며 마침내 왕비의 침전에 난입했다. 그리고 폭도들은 한 나라의 왕비를 무자비하게 시해하는 야만적 暴擧를 자행하니 참으로 치욕적이고 서글픈 역사의 한 순간-을미사변이었다. 당시 왕비 시해에 참여했던 고바야가와(小早川秀雄)의 회고록에 의하면 ??일본이 너무 충실하게 조선의 내정 개혁에 착수했기 때문에 민비는 그러한 간섭을 싫어하고 조선왕실에 대해 환심을 사려고 애쓴 러시아에 더 의지하고 싶어했다.…… 러시아와 조선왕실이 굳게 손잡고 온갖 음모를 추진하고 있는데 대해서는 一刀兩斷, 그 한쪽의 손을 잘라내는 수밖에 없었다.

즉 왕실의 중심인물인 민비를 제거하는 외에 달리 더 좋은 방법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고 민비 시해의 정치적 동기를 기록하고 있다. 일본의 조선침략에 가장 걸림돌이 되었던 왕비는 이렇게 생을 마감하였다. 이 때 왕비의 나이는 45세였고 정부의 친일정책으로 잠시 폐비까지 되었으나 곧 복위되어 국체가 대한제국으로 바뀌자 명성황후로 추존되었다.

완전히 타의에 의해서 신분의 극대화가 이루어졌고 또한 타의에 의해서 참혹하게 삶을 마감한 극과 극의 여인, 45년이라는 짧은 비극의 생애를 살았던, 그러나 굵고 파란만장한 삶을 누린 여인, 명성황후-민씨에 대한 기록은 앞에서 살펴 본 것과 같이 요약된다.

명성황후에 대한 일부의 평가나 세간의 인식은 극히 부정적이고 비판적임을 부인할 수 없다. 즉 명성황후는 자신의 세력을 보호하고 유지하기 위해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권력투쟁을 벌이고 급기야는 대원군을 파멸에 이르게 한 비열하고도 교활하기 짝이 없는 여인으로 묘사되어 왔다. 역사에 나타난 명성황후 민씨의 정치적인 궤적에 대한 인식의 저변에는 유교의 가부장적이고 男尊女卑적인 시각이 짙게 깔려 있음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당시 조선사회는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孝와 服從만이 강요된 철저한 남존여비의 사회였다. 그러한 시대에 시아버지 대원군을 상대로 권력을 쟁취하고 왕을 능가하는 절대권력을 거침없이 행사하였으니 결과적으로 나라가 망하는데 까지 이른 책임을 왕비가 고스란히 껴안는 것은 당연한 것처럼 역사는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조선의 역사상 가장 결단력 있고 과감하게 정치력을 발휘해 개혁을 실천하는데 성공한 정치인, 쇄국이라는 빗장을 걸고 독재전횡으로 흐른 막강한 권력의 상징인 대원군을 정치일선에서 제거한 여인-명성황후 민씨의 능력과 지혜는 그가 여인이어서, 그리고 대원군에 가리고 왕조의 종말이라는 비극에 눌려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명성황후 민씨가 역사 속에 부정적인 주인공으로 남겨진 이유는 아마도 그가 여자로서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방법으로 정국의 정면에 그 모습을 드러냈기 때문일 것이다. 민씨에 대한 평가는 역사적인 功過에 따라 또 다른 논의가 필요하겠지만 이러한 논의를 전제한다고 해도 그의 개인적인 자질이나 능력은 여전히 부정적인 측면이 강조되어 온 것이 사실이다.

III . 외국인 시각에 비친 명성황후

이제 시각을 돌려 외국인들의 민씨에 대한 인상기나 인물평을 살펴보면서 외국인들의 시야에 비춰진 왕비 민씨를 살펴보도록 하자. 왕비를 생전에 직접 만났거나 혹은 정치적인 교섭을 통해 접촉한 외국의 공사나 대사 혹은 선교사나 학자들의 눈에 비친 그녀는 어떠했을까? 그들은 한결같이 그녀의 총명함과 뛰어난 외교능력, 그리고 비상한 정치력에 감탄하는 글을 남겨 우리와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외국인의 글 가운데 다음은 우리의 주목을 요한다고 생각되어 여기에 소개한다.

이 글은 당시 동아시아 전문가로 조선을 방문한 60대의 영국인 이사벨라 버드 비숍 여사가 쓴 그의 대표적인 저서-<한국과 그 이웃 나라들>-에서 인용한 것이다. 비숍 여사는 왕비를 매우 사실적이고 객관적으로 소개하고 있어 흥미롭다.

??…왕비는 마흔 살을 갓 넘긴 듯 했고 퍽 우아한 자태에 늘씬한 여성이었다. 머리카락은 반짝 반짝 윤이 나는 칠흙 같은 흑발이었고 피부는 너무도 투명하여 꼭 진주빛 가루를 뿌린 듯 했다. 눈빛은 차갑고 날카로우며 예지가 빛나는 표정이었다. 특히 대화의 내용에 흥미를 갖게 되면 그녀의 얼굴은 눈부신 지성미로 빛났다. …… 그 다음 3주 동안 세 번을 더 접견할 수 있었는데 마지막 네 번째는 사적인 대담이어서 약 한시간 남짓 배알할 수 있었다. 그때마다 나는 왕비의 우아하고 고상한 태도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녀의 사려깊은 친절, 특출한 지적 능력, 통역자가 사이에 끼어 있음에도 개의치 않고 자유롭게 구사하는 놀랄 만한 말솜씨 등, 모두가 나를 놀라게 했다. 나는 그녀의 그러한 모습에서 그녀의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왕은 물론이고 그 밖의 많은 사람들을 수하에 거느리고 지휘하는 놀라운 통치력을 충분히 이해하게 되었다.??

여기에 나타난 명성황후 민씨는 아주 이지적이며 사려깊을 뿐만 아니라 친절하며 특출한 정치력을 가진 인물로 묘사된다. 비숍 여사는 영국왕립지리학회의 최초 여성회원으로서 권위있는 지리학자였고 세계의 곳곳을 답사여행하며 풍부한 경험을 쌓은 지식인이었다. 뛰어난 식견과 원숙하고도 날카로운 관찰력을 지닌 비숍 여사의 눈에 비친 왕비의 모습은 대강 그러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 때 이미 숙적인 관계에 있었던 일본의 유력한 인사들조차도 개인적으로는 명성황후를 가리켜 ??걸물??이라는 찬사를 아끼지 않고 있음도 지나쳐 버릴 수 없는 대목이다. 당시 일본공사로 일본정부를 대표했던 이노우에(井上馨)는 ??조선을 요리하기 위한 갖가지 책략이 있지만 무엇보다 선행되어야 할 것은 민비가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도록 하는 일이다. 그 이유는 민비의 원모와 지략, 그리고 수완이 너무나 뛰어나서 조선에 기울인 모든 노력과 기대가 수포로 돌아가 버리기 때문이다.?? 라고 탄식하고 있다. 이노우에는 일본 근대화의 기수가운데 한 사람으로써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한 그의 왕비에 대한 평가로 일본의 고민은 결국 대원군과 고종을 제쳐두고 왕비를 제거하기에 이른 것이라고 이해된다. 그들은 왕비를 제거하지 않고서는 조선에 대한 어떠한 계획도 성공할 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음을 왕비시해로써 입증해 보이고 있다.

v. 맺음말
역사에 대한 假定은 금물이다. 그렇지만 가정은 때로는 어떤 사실을 좀더 명료하게 부각시켜주는 방법이 되기도 한다. 명성황후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가 이에 해당하는 것이 아닐까한다. 그녀가 없었다면 대원군에 의해서 국운이 비극으로 끝나지 않고 오히려 신장되었을까. 쇄국정책이 성공을 거두어 조선왕조가 유지될 수 있었을까. 또는 명성황후 없는 고종은 어떠했을 것인가에 대한 문제를 제기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명언 – 행동가처럼 생각하라. 그리고 생각하는 사람처럼 행동하라.(헨리 버그슨) 재미있는 속담 이야기 – 칠 월 더부살이 주인 마누라 속곳 걱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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